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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형상 이후 정념의 형상을 위해 :

권용주의 작업에 대하여 

김희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진행 중인 젊은 작가의 모색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워낙 위험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글 쓰는 나자신의 내적 싸움이 정리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힘들었다. 작고한 문인 최명희의 말을 빌리면,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무수한 생각만 많고 “정신”이라 명명할 핵심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려니, 철저히 기능적, 세속적 글쓰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자인한다. 그래서 우선 기능적으로 작가 권용주에게 좋은 ‘쓰임’이 되는 글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더불어 나는 정신은 고사하고 인간이 못된 사람이 함부로 언어를 구사해서는 안 된다는 인문학적 글쓰기 자세를 믿는 사람이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이 글이 당당하다. 이 글은 비슷한 운명을 감지한 동지가 동지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고민을 공감한다 고백하는 인간적인 글이다. 인간적인 것이 인문학적 사유의 필요충분조건은 될 수 없지만, 사유를 향해 가는 상호 노력에서 행정 평가 보다 큰 미덕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작가 권용주에게, 미술동료인 권용주에게 이 점을 먼저 밝힌다.

내가 작가 권용주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은 거의 윤리적인 수준의, 혹은 너무나 고지식해 신파적인, 탐구 정신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해 보자.

 

“길거리 표피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버려진 재활용품도 아니고 폐기물도 아닌, 모호한 분류에 속하는 쓰레기들이다. 이들이 치워지지 않은 채로 자리나 형태를 바꿔가며 다른 쓰레기들과 몸을 뒤섞고 나뒹구는 모습을 관찰한다. 또 노점상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 동안 타인의 손을 탈까하는 마음에, 일종의 격식을 갖추어 싸매어 놓는 방식과 그 포장 밑으로 숨겨진 물건들이 무엇인지 슬쩍 보여주는 센스에 관심이 있다. 매일 매일 대동소이하게 조금씩 흐르는 지역의 풍경, 특히 지면에서 가장 가까운 바닥의 작은 운동들 안에서 생활 인간들 상호의 대화와 감정적 교환, 미적 교류를 발견한다. 다만 그런 생활 속 관찰과 기록들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뭔지 모를 정신적이고 미학적이며 구조적인 질문들, 교감들, 대화들을 중심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어투는 담담하나 고집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반과학적 비논리적 논제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무용하다, 비루하다 폄하되는 명제가 자기의 것이라 운명적으로 자각한 젊은이 특유의 담담함과 슬픈 웃음이 묻어난다. 어찌하랴. 이것이 내가 아는 현실이고 이것이 내가 다룰 수 있는 현실인데 그 고달픔과 비루함을 하소연해 봐야 어찌하겠는가. 길거리 표피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것이 사회계층적인 의미에서 반기득권적이고 비주류적이며 정치경제적 의미에서 반제도적인 ‘소재’라서 의도적으로 취득한 것이 아닌, 자신이 체험하는 사실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밀착’ 시키는 태도에서 자연스레 그에게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작가 김용익이 말한 미술의 요건으로서의 3 요소, 즉 체험적 현실, 개념적 명제, 그리고 양식적 원칙 중에서 작가 권용주가 드물게 체험적 현실에 뿌리를 둔 작가라는 강점이 된다. 작가는 자신의 논제가 빈약하고 부실해 보인다 때론 흔들리지만, 그 ‘빈약함과 부실함’ 라는 논제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다. 비교컨대, 작금의 미술은 개념에 이르지 못한 ‘기술 수련’과 ‘작전’만으로 성사되는 작품이 많아서인지, 체험적 현실에 기초하여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담론 구조체계에서조차 모호한 논제를 담담히 자기 것으로 인정하는 작가를 만나면, 인격적 기품마저 기대하게 된다. 자신의 미술논제에 대한 작가 권용주의 태도는 건강하고 정직하며, 그의 그릇은 크고, 향후 작가로서 혜안의 씨앗이 건강하다. 자신의 논제에 애정을 신념을 굳혀가다 보면, 까짓 권위적 담론구조와 사회적 시선에 대해 담담히 코웃음 칠 수 있는 강인한 도량을 더욱 키울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작가 권용주의 명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우선, 그는 쓰레기라 분류되는 모호한 길거리 표피의 부유물에 관심이 있으며, 그 조형적 형태가 아닌 그들의 작은 운동성에 관심이 있다. 이 운동성은 자연스레 자기들끼리 몸을 뒤섞고 나뒹굴며 흐르는 바닥의 작은 운동들에서 시작하여, 감정적 교통의 지형, 사회 구조적 질문, 미학적 탐구, 정신적 추구까지 담아내는 운동일 것이라 작가는 기대한다. 흥미있고 매력있는 명제이다. 사회 구조적 명제로만 접근하면 오히려 싱거울지 모르지만, 그것을 유심히 관찰할 경험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는 매우 난해한 명제이고 신비롭기까지 한 명제이다. 작가는 우선 그 대상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형상으로 재현해 보는 단계로 진입하였던 듯 하다.

모호한 정체들의 부유성을 면밀히 관찰하여 성격에 맞는 물성과 형식을 절합시키는 판단을 할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 <지하봉재 무지개>는 길거리 표피에 부유하는 모호한 것들의 황량한 정서를 느끼게 해주면서 그 표피성과 부유성이라는 양태가 지닌 차가움과 허허로움, 심지어 달콤한 낭만이 거울, 유리파편, 우연적 반사, 처절한 굴절 그리고 무지개로 표현된 수작이다. <누구의 산 – 우리 정상에서 만나요>는 부유하던 정서가 맹목적 노스탤지어가 되는 변태적 양태와 그 변태적 욕망의 육중한 압박, 답답한 고집불통의 맹목, 허망한 결말까지를 굳어가는 시멘트 산으로 잡아낸 또 다른 성공작이다. 꿀풀에서의 <부표> 작업은 맹목적 쏠림이 아닌 부유하는 모호한 것들의 양적 증식 상태를 잡아내어 마치 내장이 터져나온 듯한 의도적 산만함을 유리 너머로 보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는, 작가의 자의식 혹은 외부적 시선의 개입 때문인지, 작가가 그 명제의 정서적 형상 이후 ‘정신성’의 탐구에 집중해 가기 보다 그것의 구체적 양태에 함몰되어 명제를 소재로 사용하고 형태를 가시화하는데 순간 조급해졌던 듯 하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체제가 배설해내는 잉여물 이라는 건조한 사회경제학적 시각에서 쓰레기, 폐기물, 재활용품 등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길거리 표피에 나뒹구는 모종의 부유물”에 관심이 있다고 했었다. 그 부유물의 운동성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노점상 꾸러미에 눈이 간 것인데, 어느 순간 그 조형적 형태가 “운동성”을 대체해 버렸다. 그의 전시가 모종의 부유하는 것들의 “부유성”에 대한 고찰이 아닌, 부표라는 표상에 천착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세심하지 못한 미술행정가들이 “부표”라는 기호를 노인문제, 빈민문제 등의 소재로 개진하는 오류로 이어지게 된 것이고, 작가는 부유성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는 대신 조형적 압박에서 부유물들의 기념비를 만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재현으로서의 형상 이후 어떤 개념과 정신성의 탐구 차원에서 ‘운동성’을 주목하고 있음은 감지할 수 있다. 영상작업에서는 모호한 부유물들의 운동성을 다루고, 물리적인 설치작업에서는 작가가 운동성을 “연결성”으로 해석하여 접근한 듯 하다. 그런데, 두 편의 영상작업에서, 예전의 175 갤러리의 매일매일 오프닝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부표>라는 영상은 또 다른 영상작업 <내가 널 어떻게 잊겠니>와 다시 한번 개념적인 이질성을 함축하면서 전시 구성적 측면에서 의도되지 않은 산만함을 초래하였다. <내가 널 어떻게 잊겠니>는 그 불가해한 제목을 접고 본다면, 작가가 쫓고 있는 부유하는 것들의 속절없는 바지런함을 동영상과 편집으로 잡아낸 영상이다. 과거에 임민욱 작가가 부질없는 속도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잘도 굴러가는 세상을 비꼰 영상작업 <Rolling Stock>을 뮤직비디오처럼 구성했던 시도가 있었다면, 이제 권용주 작가는 세상은 왜 이리 움직여대야 하고, 이 비생산적인 부지런함을 채찍질하는 억압기제는 무엇이며, 그 끝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질문들로 이어지는 것이다. 평생 근면, 성실, 정직이라는 생활 윤리에  내몰린 이들의 상황이 마치 도심 한 가운데서 울타리에 머리를 박고 발을 구르는 망아지 꼴이 아닌가 조심스레 내비친 작가의 비판도 엿보였다. 반면, <부표>는 부유하지 못하는 – 혹은 부유에서 ‘도퇴’된 – 이들의 퇴행과 낙마, 여기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변태적 낭만을 한 편의 초췌한 잔칫상이라는 형식을 빌어 보여주는 영상작업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비디오라는 매체의 성격을 이해하는 자신의 시각은 어느 것일까. 비디오 매체성에 대한 그 자신 만의 관점이 아직 실험적 단계라서 단일한 하나로 이해할 수 없다 한다면, 설치 측면에서 <부표>라는 영상은 <누구의 산> 설치에 더 어울리는 개념적 쌍으로 하여 2층 전시장의 <누구의 산> 사진시리즈와 같이 전시했었다면 권용주 비디오의 다양성을 개방하는 측면으로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드로잉 <아마추어 건축회의>는 머리가 근육이 될 정도로 움직여대는 세상에 대한 함축적 비판을 담은 걸작이다. “몸으로 때운다”는 시대적 풍속이 있던 시절에 “몸”은 머리로 설명이 안 되는 현실을 메꾸어 주던 최후의 도구였다. 하지만, 권용주 드로잉에서 ‘근육이 되어버린 머리’는 몸으로 때우던 관성 탓에 무조건반사 운동밖에 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서글픈 풍속을 꼬집는게 아닐까.

설치작업은 엄격히 말해 지층과 지하를 연결하는 설치와, 2층 설치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별개의 설치 작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층과 지층을 연결하는 일종의 기념비적 소용돌이 설치는 작가가 앞서 시도했던 모호한 부유물들의 두 가지 정서적 양태, 즉 변태적 증식과 맹목적 집착을 반복한 느낌이고, 2층 설치는 운동성에서 파생된 아슬아슬한 연결성의 개념적 형식에 접근해 가려는 느낌이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종류의 요소가 지하-1층 작업과 2층 작업에 동일하게 등장하면서 역시 개념적 혼선 뿐 아니라 2층 작업에 대한 의혹까지 초래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직접 기술했던 거리 표피에서 부유하는 모호한 것들의 변이와 진화의 관계 양태 측면에서 2층의 ‘연결’ 모티브는 매우 흥미로운 전개였으며, 덩어리 양태를 재현한 지층 설치 보다 서사의 다양성과 극적 긴장이 기대되는 전개라 생각된다.

작가 권용주는 부유하는 것들에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그 정서적 양태를 형상으로 표현하며, 운동성에서 연결성으로 이어지는 개념적 진화를 숨가쁘게 밟아왔다. 어떤 작가는 개념에서 형상을 도출하지만, 어떤 작가는 형상을 먼저 잡고 개념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권용주 작가는 표피와 부유, 모호한 쓰레기들 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느껴지는 정서의 형상을 재현하던 시기에 있었다. 이제 다시금 개념을 심화시켜야 할 때다. 난해함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가 다루고 싶은 개념이 형상이 모호한 표피성과 부유성 이기 때문에 일단 정서적 재현에 머물게 된 것이고, 이것을 개념화 하는 것이 부조리할 수 도 있다. 나는 그럴싸한 개념을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조직적인 정리를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표피와 부유의 주체를 보다 세밀히 접근해 들어가보는 방향과, 정서의 성격을 보다 엄정히 구분해 보는 방향 두 가지 탐구를 시작해 볼 수 있겠다. 노인, 젊은이들이라는 식의 사회계층적 주체인지 혹은 쓰레기의 물질, 비물질적 구분인지부터 시작해 볼 수 있겠고, 이를 구체화하다보면 작가가 표현했던 정서의 종류가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작가 권용주가 재료와 물질이 주는 정서적 표현에 직관적으로 감이 빠르고, 체감적 현실에서의 정서적 공감이 많은 작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직적 사고 습관과 자료 연구를 의도적으로 보완해 가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타인이 ‘청년세대의 절망’이라는 식으로 손쉽게 부여하는 감상주의적 욕망에 소비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작업에 대한 절망이 아닌, 작업에서 그가 포착하고자 하는 정서가 진정 절망이라면 그 절망이 원망, 분노, 슬픔, 회한, 불안, 고독 등 여러 갈래의 느낌 중 어떤 색조의 그것인지 가려볼 수 있겠다. 부유하는 것들의 형태에 급히 몰입하지 말고, 부유하는 것들의 정체와 양태를 읽어내는데 직관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유와 학습을 하기 바란다. 정서는 모호하지만, 정념은 명확하다. 그 지문이 찍히는 것이 작업의 개념이다.

                                                                                                                                   2010.09

부표 _ 인사미술공간

우아름

 

 

8월 4일, 무더위에 비까지 와 습한 원서동. 인사미술공간에 도착하니 흥겨운 멕시코 노래와 천장까지 쌓인 폐지더미가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한쪽 벽에 나란히 붙은 중고 형광등의 적나라한 빛까지, 마주치는 모든 오브제들이 ‘날 것’ 그대로다. 한 번도 그 쓰임에서 벗어나 본 적 없어 보이는 낡은 생활도구들이 짠한 음악과 함께 그대로 전시장에 들어와 있었다. 삶의 세부가 가득 들러붙은 조형물이었다. 노끈과 테이프로 결박하거나 차광막과 탑지천막 등으로 덮어 적재한 이 물건들의 산을 천천히 뜯어보면 이런 것들이 보인다. 칠이 벗겨진 빨래 건조대, 접히는 쪽으로 때가 낀 우산, 넥타이로 돌돌 말아놓은 옷걸이들, 세숫대야에 담긴 거울이며 비누통. 오브제들 뿐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맵시조차도 ‘생활’이었다. 하기야 생활에 치여 아무렇게나, 쓰러지지만 않도록 겨우 쌓아 둔 살림살이에서 간혹 무사심한 조형성이 보이긴 한다. 빨래건조대의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 추처럼 매달아놓은 작은 돌만이 인위적이어서, 외려 작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조형물이 <부표등>이라고 한다.

 

부표는 뱃길을 알려주기 위해 바다의 수면 위에 띄워 놓는 표식이다. 전봇대나 등대처럼 땅에 붙박이지 못하고 파도에 저 자신 흔들리며 길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부표는 못미더운 지시등이다. 작가는 안주할 곳 없는 청년들의 삶에 비출 한 줄기 빛을 찾고자 윗세대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든 윗세대란, 생활고에 쫓겨 거리로 내몰린 노인들이다. 폐지 줍는 노인들의 리어카에는 노고만큼의 폐지더미가 아슬아슬하게 쌓인다. 작가의 말처럼, 9천원 남짓한 돈으로 하루하루의 생계를 잇는 생활은 너무도 비정상적이어서 차라리 조형미를 획득한다. <부표등>은 그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자신의 폐지 혹은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꽁꽁 싸매 적재한 모양을 흉내 낸 설치작업이라고 한다.

 

<부표등>으로 인미공 3개 층을 관통한 사이사이로, 영상과 사진작업을 함께 배치했다. 지하에는 정성껏 안주상을 차리고 노인 서너 분을 초대해 벌인 술자리를 기록한 영상을 틀었다. 평생의 안주거리인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간간이 젓가락과 안주용 소라껍질, 종이컵이 낙하한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죽음. 만지작거리는 제 양손, 습관으로 떠는 다리. 우물우물 오징어를 씹는 입,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의 클로즈 업. 세부를 보자면, 생은 이토록 서글프다. 마침내 한 할아버지가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한 층 올라오면 다시 1층, 멕시코 밴드 los angeles azules의 신파조 흥겨운 노래 <como te voy a olvidar> (직역하면 <내가 널 어떻게 잊어>)로 오버랩 된다. ‘부표’가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 영상을 입혀 뮤직비디오로 만들었다. 중랑천에서 학이 날아오르고, 전봇대에 매인 정체불명 당나귀 한 마리가 벽에 머리를 부빈다. 런닝 차림으로 길가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아저씨와, 후미진 서울 곳곳을 천천히 지나가는 폐지 실은 리어카들. 2층의 <부표등>은 부피가 잦아든 대신 그가 한 해 동안 ‘부표’라는 테마로 선보인 일련의 설치작 <지하 봉재 무지개> <아마추어건축회의>의 사진 이미지가 벽에 걸려있었다.

 

그 날, 오프닝 뒤풀이 자리에서 권용주 작가는 자기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은 그 한 마디에 이 리뷰를 썼다. 사연은 이렇다. 올해 초, 나는 <매일매일오프닝>이라는 전시를 하면서 기획자로 작가인 그를 만났다. 부표에 관한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 때 부표는,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절반쯤은 분노와 막막함, 그리고 누추함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 소식을 전하며 미술관 측에서 보내온 보도자료에 그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작가로 소개되고 있었다. 그와 부표에 대해서 얘기한 지도 반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시간이 흘렀으니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못내 어색했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맹랑해지는 전시가 아니었나. 그런데 절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우습게도 안도하고 있었다. 전시의 미사여구가 주는 서글픔을 기꺼이 떨칠 수 있었다.

 

다짜고짜 희망을 말하는 전시가 많다. 그렇게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희망이라는 무책임한 가상 밖에는. 오히려 절망을 세세하게 볼 때 희망의 언저리가 보인다. 희망보다 절망을 끊임없이 보는 편이 더 어렵고, 성실해야 하기도 하다. 그래서 난 아주 작은 영역을 불만과 절망의 눈으로 오랫동안 살펴보는 작가들, 작가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이냐고 반문하는 작가들을 존중한다. 궁색하고 비루한 중얼거림에서 외려 간혹 희망이 보일 때가 있다. 올 봄 꿀의 지하 쪽방에서 선보인 그의 <지하 봉재 무지개>를 기억한다. 수많은 거울 사이로 드는 햇빛이 만드는 무지개는, 기우는 해에 따라 벽 여기저기에 돌연히 맺혔다가 바람 불면 사라지기도 했다. 그 때 언뜻 작가가 무심결에 제안한 희망을 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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