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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주 개인전 <폭포_생존의 구조>

안소현(기획자, 백남준 아트센터 큐레이터)

 

 

권용주는 길거리에 버려진 혹은 방치된 사물들이 자신의 시선을 잡아 끌 때 그것을 사진이나 드로잉으로 기록한다. 그리고는 그와 비슷한 사물들을 구해와서 자신이 느낀 대로 사물들을 쌓고 묶고 이어 붙여서 구조물을 만든다. 헌 가구, 아무렇게나 뒤집어씌운 천막, 엉성하지만 끈질기게 버티고 선 화분들이 주재료가 된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그 구조물 위로 엄청난 물을 끌어올려 쏟아 붇는다. 올해로 3번째 개인전을 여는 권용주의 지금까지의 작업에는 일관된 패턴이 있다. 관찰-채집-쌓기의 과정이 그것이다. 대부분은 사물을 소재로 하지만, 가끔은 영상이나 소리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관찰하고 채집하고 이어 붙인다 (몽타주나 편집).

 

그러나 이렇게 일관된 작업에서 당황스러운 점은 작가가 특정한 대상에 왜 이끌렸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며,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사물을 채집하는 특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며, 자신이 관찰한 모습 그대로 쌓기를 흉내내지도 않는다. 가끔은 의미가 비교적 선명해질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사라져가는 도시의 모습을 대표하는 오래된 간판이나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자개장 같은 것은 일부러 작품에서 빼버리기도 한다. 이 가늠할 수 없는 구조물에서 그나마 측정이 가능한 것은 쌓아 만든 구조물이 얼마나 큰 힘을 버틸 수 있는지 쏟아 붇는 물줄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모호함에도 붙일 수 있는 이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의 스피노자주의자들이 열광해마지 않는 정서(affectus)이다. 길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친 대상은 나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한다. 그것은 막을 새도 없이 내가 그것을 마주치기 전과는 다른 상태로 나를 바꾸어 버린다. 내가 그 원인을 뒤늦게 찾을 수는 있지만, 정서 그 자체는 원인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서는 선명한 관념과 비교할 때 저열한 사유의 방식이다. 그것은 때로 원인을 알 수 없고,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정서는 그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현대철학자들은 그것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끝없는 변화와 차이에 주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피노자의 정서가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느끼는 사람의 힘(역량)을 증가시키는 정서를 기쁨, 그렇지 않은 정서를 슬픔이라고 불렀다. 힘을 증가시킬 수 있는 정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윤리학이자 정치학의 핵심이다.

 

권용주의 작업은 스피노자의 정서의 미묘한 지점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담고 있다. 물론 작가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작업을 구상한 것은 아니며, 아마도 그랬다면 그 일독(一讀)은 개념과는 거리가 먼 이 작업에 독(毒)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 여정의 한 마디를 짓고 싶어함을 핑계로 나는 비평가의 가장 위험한 행동 중 하나인 작업에 개념을 갖다 붙이기를 감행한다. 작업에 갖다 붙인 개념은 늘 작업을 환원하고 추상적으로 만들며, 무엇보다 제대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간혹, 이미 만들어진 개념이 지극히 섬세한 지점을 겨냥하고, 또 그 개념만이 포착할 수 있는 가려진 현실을 작업이 정확하게 다루고 있을 때, 개념은 작업의 의미를 촉매처럼 활성화한다.

 

권용주가 버려진 사물에서 느끼는 매력은 대부분 그 사물을 사용하던 사람이 자신의 생존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한 행동에서 발견된다. 망가진 가구를 다른 용도로 바꾸어 사용하거나 전혀 다른 사물을 가져다 덧대고, 메우고, 기워서 사용한 흔적들, 혹시나 찾아올 배고픔을 대비한 근사한 식용작물들이 그에 해당된다. 작가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지만 스피노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한마디로 기쁨이다. 권용주의 작업은 가난이나 계급에 대한 선명한 관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의 한 켠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힘의 증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힘들이 모인 결과는 엄청난 굉음을 토해내는 물줄기 밑에 꿋꿋이 버티는 아슬아슬하고 엉성해 보이는 구조물에서 발견된다. 놀랍게도 작가는 <폭포>에 ‘생존의 구조’라는 부제를 달았다. 스피노자가 정서를 “존재할 수 있는 힘(vis existendi)”이라고 부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스피노자의 반데카르트주의 철학만큼이나 파격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아주 소심하고 미미하게 새로운 정치학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권용주의 작업에 부지불식간에 관여한 사람들은 모두 온전한 교환체계 내에 속해 있지 않다. 버려진 물건을 줍고 모아 생존을 유지하는 이들은 노동량에 비례하는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원래 세금을 받고 그 일을 담당해야 하는 정부기관의 시혜적(?) 방임 하에 도시의 분해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한 몸짓이므로 기쁨이며, 폭포는 분해자의 기쁨에 대한 일종의 위로이자 오마주다. 도시의 어색한 인공폭포들을 보고 ‘부자연스러운 자연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인공물’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작가의 말을 염두에 두고, 그 기쁨을, 그 생존의 힘을 낯설어하지 말고 나누어 가져보자. 약간 더러운 물을 기꺼이 얼굴에 직접 맞아보면 그 기쁨이 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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