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주의 <만능벽 Multi-Use Wall>

안소현(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다른 작가의 작품을 위한 간이벽이나 좌대, 가구 등을 디자인/제작하고 설치를 대행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흥미롭고 보람 있는 일이지만, 미술 생산자이자 동시에 전시의 보조인력이 되면서 가끔씩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 무엇이 본업이고, 무엇이 부업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수없이 반복한 돈벌이용 잡일들이 본업이었고, 늘 마음에 두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일이 부업일지도 모른다.” –권용주의 <만능벽> 영상 자막 중에서

권용주의 <만능벽>은 전시장에서 흔히 쓰이는 흰 가벽의 샘플을 상품처럼 자동회전판 위에서 빙 글빙글 돌아가게 만든 설치와, 예술가들이 부업으로 전시설치를 하는 장면과 그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벽은 작품의 아우라가 아닌 판매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내도록 설치되어 있고, 영상은 창조적 예술활동보다는 목공과 페인트칠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설치와 영상은 엄연한 작가 권용주의 ‘작품’으로 미술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다.

작가의 태도는 혁명적이지 않다. 예술이 상업 자본에 종속되어 있음을 냉소적으로 폭로하지도 않고, 부업이 있어야만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을 힘겹게 토로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능청스럽게도 영상의 마지막에 전시디자인 업체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면서, 부업을 위해 본업인 예술작품을 이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대안을 보여주는 것 도 아니고, 일견 주어진 경제적 조건에 순응하는 소시민처럼 보이는 이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작가들은 예술이 경제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작품과 제작과정을 통해 드러내 왔다. 앤디 워 홀은 자본주의 예술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항’함으로써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강조하는 예술의 순수성을 전면 부정했다. 그러나 워홀은 예술작품을 생산해내는 ‘팩토리’를 운영함으로써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 마르크스가 우려했던 예술가의 소외, 즉 예술가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물적 대상을 만들어내지만 그 대상은 예술가에게서 분리되어 감상되고, 거래되고, 소유되는 상황에서 벗어났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예술 시장의 유일한 통로처럼 여겨지던 화랑과 컬렉터가 좌우하는 시장 시 스템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워홀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예술가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하나의 대안을 찾은 셈이다1. 산티아고 시에라는 비엔날레나 미술기관에서 황당한 퍼포먼스를 연출해서, 경제적 가치와 무관한 척하는 예술활동들 이 사회의 계급적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전시장의 벽을 떼어내어 받치고 있거나 머리를 모두 금발로 염색하는 등의 퍼포먼스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일정금 액의 돈을 제공하고, 작품의 제목에 그 액수를 밝힌다. 많지 않은 돈을 받고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예술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로 작품의 향유계층이 되지 못한다.

권용주는 투항도, 폭로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일단 예술의 순수성을 표방하면서 시장을 거부하는 보헤미안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을 시장에 팔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계속하기 위해, 또 그 작품이 시장에 팔릴 수 없기 때문에, 부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예술활동을 지속하겠 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즉 권용주가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부업의 상업성은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 하겠다는 본업의 비상업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비예술적 상품이 ‘예술작품’처럼 전시되고, 작품에서는 부업을 홍보하면서 모든 가치체계가 모호해진다.

기존 작업에서도 권용주는 일반적인 경제적 가치의 역전이나 교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부표 Buoy Light>에서는 도시의 분해자인 넝마주이들이 제한된 공간에 가능한 많은 폐품을 쌓기 위해 만들어내는 형태를 지켜보면서 그들이 오로지 생계를 위해 움직이는 가운데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설치작품으로 만들었다. 군산에서 전시된 <폭포-트리클 다운: 넘치는 물이 바닥을 적신다 Waterfall-Trickle Down>는 일제시대 풍요로운 물류의 중심지였으나 식민지 침탈로 메마른 경제의 흔적만 남아있는 도시 군산의 상황에서 착안한 것으로 당시 대통령이 제시한 ‘트리클 다운’(소득 상위 계층의 이윤창출을 극대화하면 그 혜택이 하위 계층에 전달된다는 이론) 경제정책 의 허상을 드러내었다. 서울시 창작공간 문래예술공장에서 전시한 <폭포-생존의 구조>는 부표에서 보여준 버려진 물건을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구조 위에 엄청난 물을 끌어올려 쏟아 부어서 생존 에너지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노출된 예술가의 경제적 부조리였다. 도시의 인공폭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라솔을 재현하고 싶었던 작가는 버려진 헌 파라솔을 찾았지만 구할 수가 없어 결국 근처 노점상에서 구입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공기관(서울시 창작공간)에서 제공하는 지원금은 신용 카드로만 사용할 수 있어서, 결국 작가는 새 파라솔을 카드로 구입해서 헌 것으로 교환하는 반자본주의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다 른 재료도 마찬가지였다. 넝마주이들이 모아놓은 폐가구를 구입해와서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 작품의 교환가치는 0이었고, 심지어 물을 쏟아부어 젖은 가구들은 그나마 갖고 있던 재료로서의 경제적 가치마저 상실해버렸다. 오히려 전시장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남은 재료는 다시 운송비를 들여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작업들은 하나 같이 일반적인 교환가치 획득을 위한 생산활동에는 역행하는 활동이었다.

<만능벽>에도 경제적 가치의 교란이 등장한다. 예술작품의 가치 평가의 기준이 물질적인 재료의 교환가치나 효용가치가 아니라면 예술작품의 가치는 비물질적이다.2 그러나 오늘날 전시 공간에서 그런 예술작품이 전시되기 위해서는 분명 물질적인 보조 장치, 즉 전시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 경우 전시디자인은 타인의 비물질적 생산을 보조하는 물질적 작업들이다. 물론 모든 디자인에는 비물질적 아이디어와 물질적 구현을 위한 과정이 공존하지만 “미술생산자이자 동시에 전시의 보조인력이 되면서 가끔씩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는 작가의 말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선명 한 가치의 구획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 권용주는 <만능벽>에서 부업과 본업을 뒤섞어서 예술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노동과 비물질적 노동의 경계를 흐려버린다. 물론 그에게 여전히 전시 디자인은 부업이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이 본업이다. 그러나 스스로 어디까지가 본업이고 부업 인지 모르겠다고 자조의 목소리를 내던 작가는 아무렇지 않게 미술 전시장에 상품을 진열하고, 영상을 업체 홍보 수단으로 만든다. 그래서 <만능벽>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전시 공간에든 변형해서 사용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만능벽은 전시를 위해 지극히 기능적인 효율성을 갖는 제품인 동시에 작가 본인에게는 자신의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만능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들이 부업을 할 때 흔히 예술작품의 창작에만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고충을 토로하는데, <만능벽>은 생계를 위한 노동시간(노동력)을 그대로 창작의 시간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한정된 노동력의 문제까지 해결해준다.

결국 권용주의 <만능벽>은 경제 시스템에 대한 부정도 영합도 아니지만, 작가 자신의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한 최적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 지만, 적어도 예술 시장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작가의 본업과 부업 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생존이 조금이나마 용이해진 셈이다. 그러 나 이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개인적 생존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의미는 경제적 가치의 역전과 교란에 따른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효과에서 발생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예상치 못한 사건과 결말로 극을 낯설게 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로 시선을 돌리게 하듯, 예술 전시 공간에 버젓이 놓인 ‘상품’과 작품 속에 능청스럽게 등장하는 업체의 홍보는 극 한의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과 복지 시스템의 부재를 돌아보게 한 다. <만능벽>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나 냉소적 투항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길들여진, 그리고 은연 중에 그 강화에 기여하고 있는 가치의 구획들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이상하고 낯선 장면을 통해 브레히트와 벤야민이 꿈꾸었던 예술의 정치화를 조금씩 해내고 있다.

 

1 Anton Vidokle, “Art without Market, Art without Education: Political Economy of Art”, e-flux Journal, n°43 March 2013, p.6.

1. 2 Cf. Maurizio Lazzarato, “Immaterial Labor”(1996), in Paolo Virno and Michael Hardt, eds., Radical

Thought in Italy: A Potential Politics, tr. Paul Colilli & Ed Emory, Univ. of Minnesota Pres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