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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주의 ‘가설미술’ 포탈

박찬경 (작가)

 

권용주는 일꾼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며 목수이고 미장이다. 그는 대표적으로는 김중업 박물관에서 열린 '제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퍼블릭 스토리'의 아카이브 공간을 디자인했고, 그것 말고도 몇몇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을 디자인하고 리노베이션했다. 많은 전시에 벽을 세우고 가구를 만들고 조명을 달았다. 벌이로만 보자면 다른 작가의 전시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작품 설치를 대행하는 것이 그의 주업에 속한다. <만능벽>(2014)이란 작업의 비디오에는 이런 고백도 자막으로 나온다. “예전에는 생활과 예술이 완벽하게 분리되길 원했고, 별 볼일 없는 작업들 뒤로 부끄러운 생존을 숨기려 했다. 담담하게 작업과 생활을 병치시키게 된 지금도 가끔씩은 온 몸이 쭈뼛할 때가 있다.”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마추어 작가인지 프로 작가인지 애매한 위치에 있다. 자기 작업에 대한 자신감도 그리 넘쳐보이진 않는다. 생존의 방법이 아주 자랑스럽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물론 자신의 일에 대해 창피해하는 것이 수준 높은 노동윤리는 아니지 싶다. 하지만 달리 보면 과장된 자신감이나 허황된 작가주의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겸손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작가로서 활동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청년 작가인 권용주를 긴 안목에서 보자면, 과욕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 솔직한 태도로 이런 진술을 이해해보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그게 뭐고 어떻게 평가하던, 권용주가 일과 예술이라는 두 개의 영역 사이에서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게 남는다. 이를 주제로 <만능벽>이란 작품을 만들었고, 다른 작품에도 이러한 관심사가 스며들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진술이 소박한 진실로서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이 충분히 문제제기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만능벽>은 일과 예술작업 사이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도 묻는 작업이다. 전시장에서 벽이나 가구를 제작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비디오가 그가 제작한 작은 벽에 걸려있고, 이에 나란히 (마찬가지로 비디오에 제작과정이 보이는) 또 다른 판넬 벽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있다. 관객은 단순히 전시장 가구나 벽을 제작하는 과정을 비디오로 보고, 그 결과인 벽과 마주하게 된다.

  전시장 중간에 덩그러니 서있는 (만능)벽의 한쪽은 목재의 패턴이 그대로 드러난 표면이며, 그 뒷면은 목재와 철골 등의 노출로 제작공정과 구조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벽은 전기 동력으로 회전하는 원판위에 세워져, 매장에 설치된 상품의 지위를 연상시키지만 앞뒷면을 번갈아 노출하면서 상품의 지위에서 사물의 지위로, 또 그 반대로 추락과 상승을 반복한다. 이러한 지적 단순성, 물리적 사실성이 도발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후진’(retreat) 또는 ‘철수’(withdrawal)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예술을 노동으로 환원하며, 창작을 제작으로 돌려놓고, 작품을 예술을 위한 노동의 간략한 보고서로 대체하고 있다는 면에서, 가상적인 문화나 예술기호의 세계를 실제의 일과 사물로 후퇴시킨다.

  작품에서 물건으로의 역주행은 아이러니 하기도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노동으로 환원된 ‘작업’이 예술적 가치의 인정 시스템 속에서 예술로서 잘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만능벽>과 같은 작업을 소화하는데 별다른 문제를 갖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실은 물건을 빨리 예술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을 만반의 준비를 이미 갖추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여러 전시에 반복해 초대되었고, 자기반성적인 현대미술의 입맛에 잘 맞는다. 어차피 예술에 붙어 있는 관습적인 가치체계의 교란과 그 교란의 제도화는 끝없이 맞물려 왔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이 작업의 메시지를 약화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학적인 후퇴가 단순하고 극단적일수록, 그러한 아이러니는 더 재밌는 도발처럼 보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술제도에 대해 성찰하거나 미술의 각종 조건을 반성하는 작품이 많지 않은 편이고, 모더니즘의 역사적인 약세 속에서 그런 자기비판의 전통도 희미하다. <만능벽>에서 초점을 맞춘 예술가의 노동은 미술 제도를 생각해볼 때 아주 뿌리 깊은 주제일 수밖에 없다.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인 설명은, 요즘처럼 ‘스트레스’에 치를 떠는 세상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최근의 사건을 생각해보자. 고 최고은은 영화산업에 종사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죽음은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참담한 생활고를 드러냈다. <만능벽>도 최고은 사건에 이어져 있다. 최고은의 사망은 단순히 사회복지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예술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사회적 경비를 지출하는가, 문화예술에 대한 찬양의 위선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이렇게 영화나 미술이나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노동과 관련해 미술의 특수한 문제도 있다. 예술노동이 일반적인 노동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하는 문제, 일반적인 수공 노동에 깃든 예술성의 가치, 작품에 투여된 작가의 노동이 주는 ‘윤리-미학적’ 신뢰감 등등. 미술은 산업보다 장인문화나 소상품 수공업 생산자와 관계가 깊어서, 손으로 무엇인가 직접 만든다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평가의 기준이 된다. 손이 아니라 머리나 언어가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손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미술작품의 가격은 이와 떨어지기 어렵다.

  그래서 <만능벽>의 벽이 아무리 기초적인 벽의 골격을 단순히 제시한다고 해도, 이는 권용주와 동료작가들의 수작업을 통해 창조된 것이며, 여전히 나름대로의 미학적 쾌감을 전해주는 깔끔한 하나의 오브제이고, 현실의 사용가치가 제거된 하나의 미적 대상이 된다. 이 작업은 예술노동을 일반 노동으로 후퇴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예술노동의 특수성을 오히려 단순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여전히 수작업, 현대미술에 대한 생각, 디자인과 디스플레이의 결과이며, 그 공정을 보여주는 비디오나 텍스트를 통해 작품 안에서 그 점을 강조해준다. 따라서 일반노동으로의 후퇴나 예술행위에 대한 회의는 일정한 지점에 멈추고, 예술의 존재가치를 뭔가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작품’의 지위를 되찾는 것으로 보인다. <만능벽> 비디오의 끝에서 합판의 나뭇결이 왠지 비밀스럽게 신비해 보이는 것은 마치 이러한 ‘예술성’을 비유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멈춤, 예술작품이 되기를 망설이며 마지막까지 버텨보는 제스처이다. 사실 <만능벽>에서 작가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다소 순진한 질문(예를 들어 ‘도대체 미술이란 무엇인가?’)을 하고 있는데, 그가 제시한 답은 분명하다. 생활이 예술보다 먼저이며, 어떤 미술작품도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라는 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문화인이라 하면서, 왜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은 문화인이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주로 감상이나 소비와 관련되며, 제작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뒤집어 묻는 것이다. 제아무리 특수한 예술적 노동도 누군가의 일반적인 노동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일반적 노동 속에 무엇인가 ‘예술적인 것’이 있다.

 

<부표>와 <폭포 – 생존의 구조>

 

  일견 <부표>(2010)와 <폭포>(2011-2013)는 <만능벽>과 대조적이다. <만능벽>이 기능적 정확성을 실현하는 노동의 가치와 공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부표>와 <폭포>는 노동의 예술적 측면이랄까 유희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 사용된 사물이 서로 연결된 몸체를 만들면서 사물들은 일종의 물활론적인 생명을 얻는 모습이다. 또 반대로 <만능벽>에서 보인 ‘가난의 미학’은 <폭포> 시리즈의 개념적인 기초라고 할만하다. <부표>와 <폭포>는 <만능벽>이 완고하게 억압했던 노동과 물건의 ‘예술적’ 측면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술평론가 안소현은 <폭포>에 대해 ‘가난한 삶의 한 켠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힘의 증가’를 보여준다고 적절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미묘한’이란 말보다는 ‘무작정의’라고 하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여러 뉘앙스를 풍기며 분위기를 잡는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각종 잡다한 생활소품과 폐기물의 우연한 조합이 이 작업에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면 된다’의 결기 보다는 ‘어떻게든 하겠다’는 냉소 쪽에 가까울 것이고, 나아가서는 ‘어떻게든 하면 안 될 것은 없다’의 해학 쪽이다.

  여기엔 어떤 해학, 또는 병리학적으로 비유로서 어떤 조증(躁症)이 있다. 최정화의 작품들에서 흔히 보이는 한국적 모더니티의 과대 망상적 조증, ‘개발도상국 팝아트’라고  할 만한 것이 권용주의 작업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최정화의 작업이 개도국의 ‘소비대중’이라는 집합을 떠올리게 한다면, 권용주는 도시 하층의 임시방편적인 생존 속에 존재할만한 어떤 환상처럼 보인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최대한 결핍시키고자 하는 것은 어떤 내구성(durability)이며, 채우려 하는 것은 일종의 ‘약발’이다. 이런 면에서는 김상돈의 <불광동> 작업이나 욘 복(John Bock)의 ‘하루살이(ephemeral) 미학’과 닮았다. 이 작품에는 한국의 유원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맥시멈으로 약발을 올린 트로트 댄스곡을 ‘승화’했다 할까, 뭔가 재지(Jazzy)한 유희와 약간의 체념정서가 뒤범벅 된 엑스터시가 있다.

  <폭포>에서 임프로바이즈되고 있는 재료 목록은 대체로 이렇다. 수중 펌프와 물, 건축용 목재, 타포린, 비닐, 경질염화비닐 골판, 샌드위치 판넬, 타포린, 플라스틱 박스, 양철 양동이, 선풍기 덮개, 포장천막, 차광막, pvc파이프, 개집, 고무대야, 단프라 골판, 스티로폼, 아이소핑크, 호스, 철제 사다리, 버려진 가구, 화분, 오디오 스피커, 고무장갑, 비닐, 돌 등. <폭포-생존의 구조>는 주어진 전시장의 크기와 구조에 따라 매번 다른 재료와 크기, 구조로 설치되지만, 수중 펌프를 사용해 인공 폭포를 만든다는 것만은 동일하다. 작가는 이 복잡한 구조물을 위해 예상되는 설치의 밑그림을 그리지만, 실제 현장에서 밑그림 그대로 설치되기는 어렵다. 구성물의 크기와 무게, 재질과 색 등의 ‘적절한’ 조합이 특정 공간을 염두에 두고 미리 완벽하게 설계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작품이 전시되는 현장에서 보완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현대 미술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임시변통 자체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계보다는 설계변경, 계획 실현보다는 임기응변이 이 작품에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미술의 언어로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라고 하는 편 보다는 ‘가설(假設) 미술(makeshift art)’ 이라 부르면 적당할 것이다. 설치미술이 서구에서 미니멀리즘이나, 포스트-미니멀리즘 이래 건축과 같은 사물/공간의 실재성에 관심을 보이는 예술장르라고 본다면 ‘가설미술’은 오히려 견고한 사물/공간의 허구성, 허무함, 소멸 가능성, 변화 가능성, 임시성에 관심을 보이는 쪽이 아닐까 싶다. 어떤 정교한 계획이나 치밀한 개념, 깔끔한 만듦새와 사물의 견고함이 주는 숭고 말고도, ‘되는대로 어쨌든 할 수 없이 결국은 끝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충’ 이루어지는 무엇의 스펙타클도 있을 수 있다는 식이다. ‘생존의 구조’라는 작품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것은 물론 현대 한국사회, 또는 한국의 초고속 난개발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권용주의 알레고리는 약간 만화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특히 한국의 웹툰이 뭔가 무책임하면서도 자유로운, 단순 솔직한 재미와 일말의 소소한 개그를 항상 미덕으로 삼으며 어떤 자기비하적의 유머를 즐겨 사용하는 것처럼, <폭포>에는 항상 뭔가 체념한 자가 가진 역설적인 승리나 환희의 느낌이 있다. ‘가난의 한 켠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힘의 증가’에서 더 나아간, ‘체념의 역승화’에 가깝지 않을까한다. 예를 들어, 찢어진 고무장갑에서 물이 제멋대로 터져 나올 때 그렇다. 이것은 약간 외부에 별 다른 희망이 없을 때 스스로의 동력으로 자기 자신을 위무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일종의 자위행위의 경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작품의 구조면에서도 그렇다. <만능벽>이 미술관 노동을 들이대며 결국 예술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노출하면서도 다시 미술로 돌아오는 순환구조를 지닌 것처럼, <폭포> 시리즈는 물의 자기만족적 순환을 대단히 자학적으로 과시하는 형식이다. <폭포>가 ‘에로스의 넘쳐남’의 직설로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개그의 요소에는 물론 그 이면에, 슬픔이나 체념의 정서가 깔려 있을 것이다. 심지어 <폭포>는 홍수나 재난을 연상케 한다. 예를 들어 해마다 장마철에 반복되던 ‘수재민’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한 두 번은 집안에 들이친 물을 퍼내거나,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양동이로 받쳐놓은 경험이 있을 것이기에, 이 작품은 한국 현대를 살아온 변두리 주민공통의 기억을 건드린다. 이것은 민중미술이라기 보다는 민간미술, 민간미술보다는 주민미술이라고 할 만한 기억에 연줄을 댄다. 민중에게 허무개그가 허용되지 않고, 민간이 뭔가 너무 공공성에 대립되는 느낌을 준다면, ‘주민미술’에는 생활인의 끈질김과 ‘고통의 기능전환’ 같은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어감이 있을 것이다. 최근 작품 <연경>에 설치된 실크에는 ‘자갈밭에 끌어다 놔도 살아날거고, 모래밭에 가서도 주춧돌을 만들어 집을 짓고 살 인간’ 이라는 글귀가 직조되어 있다. <폭포-생존의 구조>에서 ‘생존의 구조’가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끈질김이다. 

 

<연경>과 <석부작>

 

  연경은 방직에서 실을 이어주는 공정을 말한다. 비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작가의 어머니 나상희 씨의 설명은 이렇다. “베를 짤 때 말코가 올라오잖아. 올라오면 다음 말코에 실을.. 이어주는 거지, 그게 ‘미마리’라고 하는 건데. 우리나라 말로는 연경이야. 연경인데. 다음 실을 이어주기위해서 하는 건데 그걸 하자면...그것이 정확하게 몇 시에 올라온다는 예고가 없어. 자다가도 그게 올라오면 일하러 나와야지.” 연경은 방직의 한 단계를 통해 방직노동의 성격 일단을 드러낸다. ‘연경’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생활을 또 한 번 강조해주는 제목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방법적인 도발이나 미술관 미학에 크게 전복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과 태국의 한 구석에서 있었거나 있는 구체적인 공장노동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접근하는 편이다.

  이 작품은 비디오와 두 개의 설치로 되어있는데, 특히 다양한 색으로 염색된 실을 교차시킨 ‘설치미술’ 부분은 빛 스펙트럼의 변화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인지하게 되어있어 ‘옵아트(Op Art)’처럼 신비해보일 정도이다. 이는 <지하봉재 무지개>라는 2010년 작업에서 했던 가난과 아름다움의 겹침과 비슷한 방식이다. <연경>에서 보편적인 지각의 환상적인 쾌감과 삶의 끈질김을 나타내는 실크의 대조/겹침은, <지하봉재 무지개>에서 폐허와 같은 공간과 무지개의 대조/겹침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노동과 예술, 주민과 예술가, 사회와 미의 이원적인 구분이 이 작품에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지만, <연경>은 훨씬 구체적인 현실 노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

 비디오의 영상에는 짐 톰슨 방직공장(Jim Tomson Factory)에서 촬영한 ‘자카드’라는 방직기를 담담히 비추고, 비디오의 소리는 오랫동안 방직공장에서 일한 어머니와 태국 짐톤슨 공장에서 일한 늑 산돈(Nuek Sandon) 씨와의 인터뷰가 교차된다.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방직노동이 태국에서 거의 같은 패턴으로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터뷰가 상당히 회고적이고 차분한 톤으로 이어지며 노동과 삶의 세부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반면, 무인공장 기계의 반복적이고 강력한 자동 동작은 인간이 분주하게 움직였던 과거의 공장과  대조된다. “다른 건 생각이 안나는데... 그 치분에,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가루가, 네 머리 위에 떨어져 눈같이 하아얗게 내렸을 때. 그게 한 번씩 문득문득 생각이 나더라고.”와 같은 어머니의 인간적인 회고는 한 두 명의 노동자가 가까스로 남아있는 공장에서 질서정연한 군대처럼 작동하는 무심한 기계 모습에 튕겨져 나간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실크 공장이 있는 태국의 나콘 랏차시마(Nakhon Ratchasima)에서) 점심을 먹으러 쏟아져 나오는 젊은 기술직 아가씨들 사이에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비쳤다. 그네들은 엄마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들의 배움도, 건강도, 운명도 닮았다. 하지만 노동집약, 경공업, 중공업, 후발효과 같은 교과서 용어들로 설명하기에는 이 ‘산업’은 백인백색의 삶만큼이나 복잡했다. 양국의 방직산업을 비교하고, 산업에 종속된 삶을 살펴보고자 했던 작업의 의도는 애시 당초 글러먹었는지, 아니면 먼 곳에서 만난 나의 젊은 어머니를 닮은 이들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는 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 작가가 의도했던 세계자본주의와 노동양태의 복잡한 일단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약해졌는지 몰라도, 노동자 개인 개인의 실존에 대한 관심은 이제는 역설적으로 노동 자체가 점점 희미해지는 현대 산업생산의 현장을 보여주게 된다.

  비디오에서 전자동 베틀이 짜내는 물건은 이 비디오와 함께 설치된 천이다. ‘자갈밭에 끌어다 놔도 살아날 거고, 모래밭에 가서도 주춧돌을 만들어 집을 짓고 살 인간’ 이라는 글귀를 실크에 직조해내는 방직기계를 우리는 비디오를 통해 보게 되고, 바로 그 실크가 천정에서 바닥으로 길게 드리워진 상태로 함께 전시되고 있다. 어머니와 늑 산돈 씨의 진술은 다분히 회고적이며, 영상에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노동은 이미 희미하게 사라지는 중이며, 끈질긴 삶에 대한 ‘자갈밭에...’의 진술도 인간노동이 아니라 자동기계가 만들어낸 결과로 제시된다. 이렇게 보면, 그가 자평하는 것과는 달리 방직산업에 대한 거시적인 연구는 이 작업에 어느 정도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노동에 대해 말하고 보여주는 것 자체가 과거의 사건처럼 느껴지는 시대이며, 노동의 이러한 비가시성이야말로 경관이 지배하는 현대 도시지리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노동이나 삶 자체가 버추얼 해지거나 가시권의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환상이야말로 어떤 실재의 느낌을 다시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경>에 설치된 염사의 유령성, <지하봉재 무지개>의 무지개효과, <폭포>의 폭포수가 주는 만화적 환상 등등은 노동-현실-사회-상상-환상-예술의 층을 거꾸로 세우며, 갈수록 희미해지는 노동-현실 축을 다시 강렬하게 하고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런 요소들이 너무 가난을 파는 예술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환상-예술의 축은 항상 노동-현실의 축으로 뒤집어진다. 이것은 <만능벽>에서 비디오가 노동을 보여준다고 해도, 작품 전체로서는 오히려 노동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구조와도 같다.

  최근작인 <석부작>에 대해 설명한 권용주의 이메일에서 그는 “몇개의 시멘트 덩어리에 풍란을 붙이고 근 한 달 동안 물을 뿌리며 키우다 보니 석부작이라는 몰락한 고급취미가 주는 신선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고작 손바닥만 한 이  작은 풍경이 상상 속에서나마 절경(환상-낙원)에 이를 수 있는 일종의 포탈(portal)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어요.” 라고 써 보냈다. 결국 이 ‘환상-낙원’이 무엇일지,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것이 어떻게 현실의 축으로 다시 판을 뒤집는지가 중요하며, 또 그것이 앞으로의 작업에서 어떻게 발전될지 궁금해진다.

  <석부작>은 시멘트 파편, 벽돌, 계란판, 폐지, 페인트 롤러, 패트병 등을 거푸집 삼아 시멘트로 떠낸 뒤에 그에 풍란과 금루각 등의 난을 붙여 기르는 작업이다. 시멘트로 가짜 바위를 만들고, 저 고고한 난초도 이를 돌로 오인해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이 작업에서 그동안 권용주가 사용해온 ‘현실(실재성, 노동 등)과 낙원(상징, 예술 등)의 교배’가 가장 극적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누구의 산-우리 정상에서 만나요>(2009)에서 백두산을 시멘트로 만들었을 때, 백두산이라는 민족 이데올로기는 누가 봐도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실패한 포탈이다. 반면에 무지개 포탈, 염색실 포탈, 폭포 포탈, 난초 포탈 등은 우리를 가상 저편으로 유인하는 상당히 매혹적인 스크린이다.

  세상이 자갈밭, 모래밭, 똥밭이라면 ‘도피’는 그 자체로 현실의 일부일 것이다. 감옥의 창은 외부의 자유로 나가는 스크린이고, 잔고가 없는 통장은 해외여행의 가상 포탈이니까 말이다. 이는 권용주의 작업에서 골격을 이루는 방법이자 성향이자 문제의식이다. 예를 들어, <아마츄어 건축회의>(2010)에 설치된 시멘트 벽돌은 뇌를 그린 그림과 병치되어 있다. 무거운 벽돌을 등에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건설노동자의 뇌에 어떤 탈출구가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예로, 아트스페이스 풀의 마당에 설치했던 시멘트 블록에는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새겨져 있다.(<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2010)) <녹는점>(2013)은 연극적인 방식으로 현실과 낙원사이의 포탈을 제시해 놓은 형국이다. 포탈은 현실이 녹아 내리는 지점이니 이 작업은 아주 말 그대로이다. 

  아마도 미술관, 갤러리 등에서는 작가에게 더 매력적이고 그럴듯한 포탈을 만들어주길 원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가난의 한 켠에서 미묘하게 증가하는 에너지’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 자체가 다시 공사현장의 시멘트처럼 객관화되지 않는다면, 노동이 사라진 금융자본의 추상성이나 예술상징자본의 허구성, 또는 ‘흙수저’에 대한 싸구려 감상을 닮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은 예술작품이 그렇다. 그래서 포탈은 역승화의 방식이어야지 승화의 방식이 되어서는 재미없지 않을까. 일꾼이자 예술가인 권용주가 지닌 강점은 그런 역승화, 포탈에서 이승으로의 철수, 낙원에서 자갈밭으로의 낙하와 같은 것의 여러 느낌에 정통하다는 점에 있다. ‘포스트-인터넷 문화’가 여전히 노동의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요즘처럼 적나라하게 (안)알려주는 시대가 있을까 싶기 때문에, 권용주의 접근방식에 더 흥미를 갖게 된다. (박찬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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